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7 긴급회의 (문단 편집) === 북벌과 [[국공결렬]] === 1926년 7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장제스는 [[리쭝런]], [[바이충시]], [[탕성즈]] 등 국민당에 가입한 군벌들과 힘을 합쳐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했다. 국민혁명군은 파죽지세로 [[우페이푸]]의 양호 지역을 장악했고 [[쑨촨팡]]의 강소, 절강, 복건 지역으로도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중산함 사건 이후 장제스와 적대적인 관계가 된 공산당은 장제스를 기회주의적 군인, 신흥 군벌, 군사 독재자로 비판하면서 장제스 타도를 주장했고 이를 위해 프랑스로 떠난 왕징웨이를 귀국시키자는 영왕운동을 전개했다. 영왕운동에 이어 우한과 난창 중에 어느 곳을 수도로 정할 지를 두고 천도논쟁이 발생하면서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우한에 설립된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의 상무위원회 주석 자리를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 당권에 복속시키려 했다. 장제스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우한을 인정하지 않고 난창 천도론을 내세웠지만 결국 우한 천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화해를 위해 [[덩옌다]]를 비롯한 공산당원들과 접촉하고 우한으로 가서 보로딘과 만났지만 보로딘은 장제스 타도를 계속 주장하였고 [[바실리 블류헤르]]가 장제스를 위해 일하는 것도 금지했다. 이어 우한 국민정부가 과격한 사회개혁과 무력으로 조계지를 회수하는 혁명외교를 전개하자 중산층, 향신의 불만이 가중되었으며 열강과 국민당이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결국 [[난징사건]]과 4.2 난창기의 이후, 장제스를 포함한 국민당 우파들은 국공합작을 지속하다가는 국민당이 적화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1927년 4월 12일, [[4.12 상하이 쿠데타]]를 감행하여 국공합작의 종결을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